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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동국대 김성철 교수
힐링 아트 북 [고승과 수인] 발간 안내 본문
Healing Art Book 이라는 표제를 걸고
<고승과 수인>이라는 책을 발간했습니다. 부제는 - 김성철의 테라코타 2D 작품전 - 입니다.
네이버 책소개: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5912772
종이책과 eBook의 두 가지 방식으로 출간했으며 가격은 각각 다음과 같습니다.
종이책: 63,000원
eBook(전자도서): 4,500원
종이책을 구입하고자 하는 분은 아래의 내용을 참조하시어 이메일을 통해 출판사로 주문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책의 고급양장 아트북 가격은 63,000원(종이책)이며 주문제작합니다.
종이책 구입을 원하는 분은, 이메일 otakubook@naver.com으로
'성함'과 '주소'와 '휴대전화번호'를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이메일 수신 후 회신을 통해 도서출판 오타쿠의 은행 계좌번호를 알려드리며,
입금이 확인되면 ≪고승과 수인≫ 아트북을 배송해드립니다. (배송비 무료)
eBook 전문서점 Ridibooks 링크는 아래와 같습니다.
https://ridibooks.com/v2/Detail?id=1892000062
교보문고 eBook 링크는 아래와 같습니다.
http://digital.kyobobook.co.kr/digital/ebook/ebookDetail.ink?barcode=480D190323850
YES24 eBook 링크는 아래와 같습니다.
http://www.yes24.com/Product/Goods/71037968
알라딘 eBook 링크는 아래와 같습니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87020424
얼마 전에 시집을 출간하신 동국대 경주캠퍼스 김성철 교수님이 고교 시절 이후 근 40년 이상 제작해 온 테라코타 작품 사진첩입니다. 한 작품 당 10매 내외의 사진을 촬영하여 실음으로써, 테라코타 실물을 보는 느낌이 들도록 편집하였습니다. 표지 사진과 <작가의 변> 그리고 책에 실린 모든 작품을 Thumbnail 사진으로 만들어 아래에 올립니다.
작가의 변
나와 테라코타의 만남
나는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4B연필로 손목시계나 손을 그리는 정밀묘사가 특기였다. 미술학원을 다닌 적은 없었지만, 양정중학교 1학년과 2년 때 고궁에서 열렸던 교내 사생대회에서 연거푸 최고상을 받았다. 공부로 전교 1등을 해 본 적은 없었지만 그림으로는 두 번이나 1등을 했다. 입시를 치르고 서울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특별활동부로 미술반에 들어갔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거의 매일 미술반 특활실로 가서 그림을 그렸다. 중학교 때부터 시작했던 유화를 주로 그렸다.
2학년 1학기 때의 어느 날이었다. 방과 후 미술반에 남아서 친구들과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그 당시 서울고등학교 미술교사로 재직하셨던 최충웅 선생님(전 서울산업대 조형예술학과 교수)께서 들어오시더니 우리들을 학교 한 귀퉁이에 있는 허름한 창고로 데리고 가셨다. 당신께서 사용하시는 조소彫塑 작업실이었다. 조소용 찰흙이 가득 담긴 큰 드럼통도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두상頭像을 만들 때 심봉心棒으로 사용하는 조소대와 노끈뭉치를 우리들에게 나누어주시면서 각자 자신의 얼굴을 만들어 보라고 하셨다. 이 때부터 점토와 나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최 선생님께서는 얼굴의 해부학적 구조까지 설명하면서 우리들의 ‘자소상自塑像’제작을 지도해 주셨다. 콧등에 걸쳐있는 얼굴의 미세한 근육까지 표현할 것, 처음 조각을 하면 대개 턱을 치켜든 모습이 되니 주의할 것 등등 최 선생님께서는 인물 조형의 거의 모든 것을 미술반 학생들에게 가르쳐주셨다. 그 날 이후 나는 버스만 타면 사람들의 얼굴을 유심히 관찰하였다. 얼굴의 굴곡, 입술의 모양, 콧구멍과 귓바퀴의 생김새 등등 …. 얼굴 모습 세부를 암기하듯이 살폈고, 종례 시간이 끝나면 부리나케 찰흙 점토가 기다리는 헛간으로 달려갔다. 거울을 보면서 며칠에 걸쳐서 작업한 끝에 우리들 모두 자소상을 완성하였다. 내 작품을 보신 최충웅 선생님께서는 참 잘 만들었다고 칭찬하셨지만, 귀의 위치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셨다. 내 작품에서는 귀를 얼굴 측면의 중앙에 붙여 놓았는데, 실제 사람의 귀는 뒤통수 쪽으로 한참 밀려있다고 지적해 주셨다. 친구들의 옆모습을 보니 진짜 그랬다. 거울로는 나의 옆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었기에 실수를 한 것이었다. 수정하려고 하니 선생님께서는 그냥 두라고 하셨다. 이어서 최 선생님께서는 석고 뜨기 하는 방법에서 시작하여 완성된 석고상에 페인트를 칠하여 마치 녹슨 브론즈 조각처럼 보이게 하는 기법까지 일일이 시범을 보이면서 지도해주셨다. 개성 넘치는 석고 두상들이 탄생하였다.
그러던 중에 신문에서 권진규라는 조각가의 추모전이 명동화랑에서 열린다는 기사를 보았다. 기사 전문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자살로 고독한 예술을 청산한, 조각가 권진규 일주기 추모전
15~19일 명동화랑서, 자각상 등 각계 소장 27점 출품
작년 5월 51세의 한창 나이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살함으로써 화단에 충격을 던졌던 조각가 권진규씨의 일주기를 맞아 추모작품전이 15일부터 명동화랑에서 열리고 있다(19일까지).
작품전에 나온 작품들은 모두가 가까운 친구들 박혜일, 이규호, 안동림, 김문호, 권옥연씨 등이 지니고 있던 테라코타와 릴리프 데상 등 27점. 권씨의 생전 모습인 검은 쉐터 차림의 포트레이트와 작품이 늘어져있는 허름한 화실풍경에 담겨져 있어 고독하고 불우했던 예술가의 모습이 생생하게 전해온다.
권씨는 52년 일본 다떼소노 미술학교 조각과 출신. 로뎅, 부르데르 , 시미즈(淸水多喜示)등 세계적인 조각가의 정통파 계열의 작품 수법과 이어지는 그는 51년 일본 이과회에 입선, 52년 이과상을 수상함으로써 조각가로서의 재능을 크게 평가받았던 사람이다. 65년 9월 서울에서 첫 전시회를 가졌고(신문회관), 68년 7월 일본에 있던 동창, 친구들의 주선으로 일본橋니혼바시화랑」에서 두 번째 작품전을, 71년 12월 3회전을 명동화랑에서 가졌으며 그의 작품들은 주한 프랑스대사관, 일본국립근대미술관, 고려대학교박물관(3점), 아주공과대학, 수도사대 등에 소장되어 있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 기거했던 성북구 동선동 누이의 집에서 뜰 한 편에 창고처럼 한간 아뜰리에를 차려놓고 홍대, 수도여사대, 서울공대 등의 시간강사로 전전하면서 작품제작에만 몰두, 일상생활의 기쁨을 배제한 혼자만의 생활을 했다. 그는 우리나라의 고유한 건칠을 개발, 작품에 끌어들였고 우리민족의 것, 한국적인 리얼리즘을 투영, 테라코타에 뛰어난 작가로 손꼽힌다.
추모전에는 붓을 한 번 들자 그렸다는 세 마리의 게, 데상 2점 등의 소품과 섬뜩하도록 건장한 왼손, 대표작으로 꼽히는 흉상 10점, 특히 고려대학 소장품인 자각상과 비구니는 그의 최고작으로 꼽힌다.
이 밖에 릴리프「작품, 망향, 문, 소, 곡예사」와 흉상, 念, 가면, 고양이, 좌상, 「오월의 여왕, 「여인상, 「응시 등 작품들이 몸부림쳤던 권씨의 예술에의 집념을 아쉽게 해주고 있다.
- 동아일보 1974년 5월 17일 -
처음 배운 조소 작업에 심취해 있었기에, 다음 날 학교가 끝난 후 권진규 유작전을 보기 위해서 곧장 명동으로 달려갔다. 신문에 명동화랑의 주소나 위치가 적혀있지 않았지만 명동에 있을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가방을 팔에 끼고서 골목을 샅샅이 뒤졌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명동화랑은 보이지 않았다. 참으로 난감했다. 미술도구를 판매하는 화방이 눈에 띄었다. 그곳에서는 명동화랑의 위치를 알 것 같았다. 화방 주인은 여자 분이었는데 명동화랑에 대해 물었더니, 빙긋이 웃으면서 이곳이 아니라 안국동 로터리에 있다고 친절하게 알려주셨다. 다시 걸어서 안국동 명동화랑을 찾아갔다. 입구에 들어섰다. 작품 하나하나가 독립조명을 받으며 생명처럼 살아 있었다. 삭발에 붉은 가사를 걸친 모습의 자소상, 비구니, 여인좌상, 손 …. 그야말로 몸서리치는 감동이 일었다. 작품들을 면밀히 살폈다. 보고 또 보았다. 전시장을 여러 바퀴 돌았다. 충격적인 ‘자소상’, ‘나부’와 ‘손’의 입체감. 권진규의 작품에는 여러 가지 특징이 있겠지만, 나에게 권진규를 평하라면 ‘입체의 비밀을 아는 조각가’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조각이 3차원 입체의 예술이지만, 2차원의 회화적 평면을 조합한 느낌의 조각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권진규는 입체를 안다. 입체를 아는, 우리가 사는 3차원세계의 본질을 아는, 몇 안 되는 조각가 가운데 하나다.
동아일보 기사에서는 ‘왼손’이라는 제목으로 소개했던, 작품 ‘손’은 원시성이 강하게 느껴지는 작품인데, 특이한 것은 기역자로 굽힌 후 뒤로 활짝 젖힌 엄지손가락에서 둘째 관절이 역으로 꺾인 모습이었다. 원래 손가락의 모든 관절은 안으로만 굽힐 수 있지 뒤로 젖혀지지는 않는다. 그런데 권진규의 ‘손’을 보면 엄지의 관절이 바깥쪽으로 활처럼 휘어져 있다. 작품을 보면서 흉내 내려고 해도 그 당시 내 손으로는 도저히 그런 포즈를 만들 수가 없었다. 엄지를 굽히고 아무리 뒤로 젖혀도 둘째 관절을 180도 이상 뒤로 꺾을 수가 없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강열했기에, 그 날 이후 틈만 나면 버릇처럼 왼손의 엄지를 기역자로 굽히고서 뒤로 젖혀보았다. 언제부터인가 나의 왼손 엄지는 180도 이상 뒤로 젖혀지며 권진규의 ‘손’과 똑같은 포즈를 잡을 수 있게 되었다.
명동화랑의 전시회 이후 나는 권진규의 작품을 모방하기 시작했다. 자소상의 첫 작품이 완성된 다음에는 비구니 스님 모습의 흉상을 만들었다. 그리고 여름 방학이 되었다. 최 선생님께서는 우리 미술반 친구들을 망우리의 신내동에 있는 항아리 공장으로 모이게 하셨다. 직접 장작으로 불을 때어 전통가마에서 뚝배기와 항아리 등을 만드는 곳이었는데, 조각가들의 테라코타 작업에 협조적이어서, 공장 한 귀퉁이에 작업공간도 내어주고, 특별히 신경을 써서 작품을 소성해주는 곳이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푸레토기 서울시 지정 무형문화재인 배요섭 선생이 운영하는 한미요업이었다. (그 때 이후 1991년까지 만든 작품들은 모두 한미요업의 가마에 의뢰하여 소성한 것들이다. 몇 년 후 집에서 만든 작품을 굽기 위해서 한미요업을 다시 찾았을 때 그 자리는 아파트단지로 변해있었다. 수소문 끝에 남양주로 이사한 주소를 알아내어 찾아갔으나 인기척이 없어서 되돌아온 적도 있었다. 지금은 경기도 화성의 제부도 입구로 이전하였고 이름도 ‘푸레도기연구소’로 바뀌었으며, 이곳 역시 찾아간 적이 있으나 비어 있었고, 나중에 전화로 물으니 더 이상 테라코타 소성작업을 대행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며칠 동안 나와 미술반 친구들은 출근하듯이 그곳을 방문하여 테라코타 작업을 하였다. 높이 20cm 이하의 소품들이었다. 대학입시를 1년 반 정도 남긴 여름방학에 고등학교 2학년생이 자신의 진로와 무관하게 며칠에 걸쳐서 찰흙으로 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지금의 고등학생들은 상상도 못할 일일 것이다. 소성을 위해서 한미요업에 그대로 두고 왔던 작품들은 개학 후 학교로 배달되었다. 소포를 열었다. 누렇게 말랐던 진흙 덩어리들이 진갈색 또는 검은 색의 멋진 테라코타 작품으로 변신해 있었다. 누군가가 나에게 최충웅 선생님께서 부르신다고 전했다. 선생님께서는 내 작품에 대해 극찬을 하시면서 “미술대학 조소과 3학년 정도 실력이 된다.”고 말씀하셨다. 많이 기뻤다.
학교의 조소 작업실에서 만든 석고 작품과, 방학 중 한미요업에서 만든 테라코타들은 그 해 가을에 열렸던 예술제에서 전시되었다. 내 작품 가운데 석고상으로는 자소상과 비구니상이 있었고 테라코타로는 ‘불가사리’라고 제목을 단 독특한 모양의 단지와 권진규의 작품을 흉내 낸 삭발한 스님 두상 5, 6점이 전시되었다. 내 작품에 대해 친구와 후배들의 칭송이 자자했다. 고등학교 2학년 올라가면서 전공분야를 가를 때, 문과를 희망했지만, 어릴 때부터 과학에 소질이 있었기에 이과를 선택 당했던 나는, 미술에도 소질이 있으니까 건축공학과에 가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테라코타 작품이 탄생하면서, 조각가의 꿈을 꾸게 되었다. 조각은 참 잘 할 수 있을 것 같고,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주변의 반대와 만류로 꿈을 접었다. 조각을 가르쳐 주고 나의 소질을 알게 해 주셨던 최충웅 선생님조차 만류하셨다. 그 이유는 “배고프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꿈을 접었다. 그리곤 원래대로 건축과 진학을 목표로 공부하던 어느 날이었다. 치과의사라는 직업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고3 지도에 고달파하시던 화학 선생님께서 치과의사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아침에 10시에 출근했다가 두어 시간 환자보고, 점심식사 후 오후에 두어 시간 환자 보면 퇴근한다.”는 것이었다. 결심을 굳혔다. “나는 치과의사가 될 것이다. 치과의사로 생활하면서 그림도 그리고 테라코타도 만들지만 미술평론가가 될 것이다.” 전문적인 화가나 조각가로 활동하기는 불가능하겠지만, 글을 쓰는 미술평론가는 치과의사라는 직업과 충분히 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는 성적이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반에서 중간 정도였다. 재수까지 포함하여 전교생의 반 정도가 서울대학교에 진학하고, 아주 공부를 못하는 학생들도 웬만한 서울 소재 대학교 정도는 무난히 들어가는 소위 일류 고등학교였지만 상대적으로 비교할 때 고2 때까지 나는 공부를 잘 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 당시 입시준비생의 필독서였던 ≪수학의 정석≫이나 ≪정통종합영어≫ 같은 책도 고2 때까지는 구입하지 않았을 정도로 공부에 별 신경을 쓰지 않고 미술반 활동을 즐겼다. 그러나 고3이 되면서 공부에 전념하였다. 2학년 때까지는 거의 매일 가던 미술반이었는데 고3이 되어서는 한 번도 들르지 않을 정도로 입시공부에 몰두했다. 3학년 2학기가 되면서 성적이 많이 좋아졌다. 입시사정 때 담임이셨던 정완호 선생님(전 교원대학 총장)께서는 “네 성적으로는 서울대 의대든 어디든 다 갈 수 있으니 마음대로 지원하라.”고 하셨다. 그러나 나는 치과대학을 선택하였다. 의사가 될 마음은 원래 없었고 중요한 것은 ‘자유롭게 다른 것을 할 수 있는 직업’이었다. 1976년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에 입학하자 청계천 책방을 뒤지면서 철학과 미술에 대한 책들을 구입하여 탐독하였다. 미술평론에 대해 어느 정도 공부한 후에 예과 2학년 말에 ‘다락방’이라는 서클에 다니던 친구의 부탁으로 ‘현대미술을 감상하는 방법’이라는 글을 써주어서 그 소식지에 실은 적도 있었다. 또 그 때의 공부가 토대가 되어서, 김태원이라는 도예가가 ‘흙으로부터 탄생을 위한 남근, 여근 전’이라는 제목으로 포스코(Posco) 갤러리에서 초대전을 개최할 때 작품평을 써 주었고, 도록에 실린 그 글의 영어 번역이, 다시 독일어로 번역되어 독일의 저명한 도예잡지에 실린 적도 있다. 1998년에 중앙승가대학에서 강사생활 할 때의 일이었다.
대학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서울고등학교 미술반 반장을 했던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홍익대 미대를 나온 자기 누님 친구가 성균관대학교 앞에서 화실을 운영하는데, 그곳에 모여서 고등학교 때처럼 다시 그림을 그리자는 것이었다. 이미 집 근처의 화실에 등록을 하고 그림을 그리던 나였지만, 친구의 제안에 흔쾌히 동의하였다. 그런데 두어 달 다니다 보니, 매달 화실에 지불하는 우리들의 돈을 모으면, 적절한 공간을 빌려서 직접 아틀리에를 운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친구들과 의논한 끝에 그렇게 하기로 결정하였다. 모두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에 다니고 있었기에 인근인 봉천동 4거리 개인주택에 딸린 상가 2층을 임대하였고, 학교 수업을 마치면 거의 매일 아틀리에에 들러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이듬해인 1977년이 되자, 공과대학에 다니던 친구들이 공릉동에서 수업을 받아야 했기에 아틀리에를 관악산과 공릉동의 중간 지점으로 옮기기로 하였다. 용산과 아현동을 거쳐 북아현동의 가구점 2층을 임대하여 아틀리에 운영을 지속하였다. 1978년 봄에 종로 3가의 ‘예총화랑’에서 우리 모두 처음이자 마지막 전시회를 열었고 근 2년 반을 지속하던 아틀리에의 문을 닫았다. 서울대학교 치의예과에 재학하던 2년 동안, 거의 매일을 그림과 함께 살았고, 간혹 테라코타 작품도 만들었던 것이다.
조각 또는 조소 가운데 유독 테라코타만을 고집했던 이유는 내가 만진 흙덩어리 그대로가 작품이 된다는 매력 때문이었다. 찰흙으로 원형을 만든 후 석고 뜨기를 하게 되면 변형이 일어날 뿐만 아니라, 최종 결과물의 재질이 애초에 내 손길이 닿았던 재료가 아니기에, 작품에 대한 애정이 덜 느껴졌다. 그러나 테라코타의 경우, 내 손길이 닿은 점토가 그대로 굳어서 작품으로 탄생한다. 석고 뜨기와 같이 예술과는 무관한 기계적인 작업을 하지 않아도 된다. 마치 요리가 익듯이, 불과 만나서 숙성을 시켜서 작품을 만든다는 것, 테라코타의 매력이었다.
불교학자가 테라코타 작품집을 내게 된 이유
그러던 중 우연히 집안 서가에 꽂혀있던 <능엄경>을 보게 되었다. 치과대학 본과 1학년 때의 일이었다. 세상에 이런 종교가 있나 싶을 정도로 엄청난 가르침이 가득했다. <능엄경>에서 받은 감동을 계기로 치과의사를 생업으로 삼으면서 평생 참선을 하고, 불교를 공부하는 삶을 살겠다는 원을 세운 후 그 동안 그렇게 몰두했던 미술에서 손을 놓았다. 이에 대한 얘기는 불교계 잡지 여기, 저기에 몇 번 소개한 적이 있다. 고등학교 2학년 이후 미술에 몰두했던 것처럼, 치과대학 본과 1학년 이후 불교공부에 몰두했고, 공중보건의사로서 병역의무를 마치고 치과대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후 1987년에 동국대 대학원 인도철학과에 입학하였다. ‘공空의 논리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중관학中觀學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도 받았고, 전공과 관련하여 여러 권의 책을 출간하였다. 학문적 업적을 좋게 평가받아, 너무나 감사하게도 2000년 3월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불교학과에 부임하여 불교를 연구하며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치과의사에서 불교학자로 변신을 하였지만, 테라코타와 미술을 향한 내 마음 속 불길은 꺼지지 않고 있었다. 불교학의 길을 걸으면서 미술의 불길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불교를 향한 열정의 불길이 너무나 거세게 타올랐기에, 미술에 대한 열정이 빛을 잃었던 것일 뿐이었다. 마치 해가 뜨면 별빛이 보이지 않지만, 별 그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듯이 …. 그래서 그야말로 몇 년에 한 번씩 어떤 계기가 생기면 찰흙을 구하여 테라코타 작업을 하였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아들아이의 숙제 때문에 학습용 점토를 구입하기 위해서 문방구에 들렀다가, 2, 30덩어리를 대량 구입하여 충동적으로 만든 작품이 이 책 161쪽에 실린 ‘장남 용석 두상’이다. 이런 식으로 몇 년에 한 번씩 간헐적으로 테라코타 작업을 하다가, 지난 2013년 1년 동안의 안식년을 받아서, 본격적으로 테라코타 작업에 들어갔다. 그 때 만든 작품이 ‘성철 스님 두상, 남자 좌상, 법정 스님 흉상, 사다함 입상, 여원인, 한 손가락 법문 등의 여섯 점이다.
언젠가는 내가 그 동안 만든 모든 작품들을 모아서 전시회를 가질 예정이지만, 그 시기는 정년퇴임 이후가 될 것이다. 지금은 불교 연구자로서, 교육자로서 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격적인 실물 전시회를 열기 이전에 이렇게 작품 사진으로 2D 전시회를 여는 것도 의미 있을 것 같다. 퇴직 후에는 서울 근교 적당한 곳에 작업실을 마련하고서, 소성 작업도 손수 하면서 본격적으로 테라코타 작업에 들어갈 계획이다.
≪억울한 누명≫이라는 제목의 첫 시집을 발간한 후 얼마 되지 않았는데, 나를 알던 많은 분들에게 테라코타 작가로서 선을 보이게 되었다. 치과의사가 불교학과 교수가 되었다는 것도 상식에서 벗어난 일이었지만, 갑자기 시집을 낸 것도 그렇고, 테라코타 작품 사진집을 낸 것은 더더욱 엉뚱한 일로 보일지도 모른다. 남에게 비친 겉모습은 그럴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 모든 과정이 필연이었다. 조각가가 꿈이었던 소년은 주변의 만류로 ‘생계’를 위하여 치과의사가 되었고, 도중에 불교를 만나서 주경야독과 같이 공부하며 치과의사와 불교학자의 길을 함께 걷다가, 대여섯 권의 책을 출간하고 활발히 활동하면서 자연스럽게 불교학과 교수로 전직을 하였다. 집은 서울인데 직장이 경주이기에 학기 중에는 매주 왕복 8시간 이상을 고속버스 속에서 무료하게 보내다 보니, 떠오르는 시상을 메모하는 버릇이 생겼고, 그런 메모가 5, 6년 모여서 시집 한 권 분량이 되었다. 그리고 퇴임을 몇 년 앞 둔 지금, 소년시절의 꿈을 이루리라 계획하면서 그 동안 틈틈이 만들어 온 작품을 사진첩으로 만들어 지인들에게 선을 보이게 되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테라코타 작업의 소재는 삭발하신 스님의 모습 아니면 불보살의 손 모습, 즉 수인手印이 대부분이다. 모두 불교와 관계된다. 얼마 전에 발간한 시집의 부제도 ‘김성철 교수의 불교 시 모음’으로 달았다. 얼핏 보면 이것저것, 산만하게 활동을 하는 것 같겠지만 나에게는 모든 것이 필연이었다. 나의 이런 모든 작업의 공통분모로 불교가 있다.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불교를 바르게 알리고, 보다 많은 사람들을 부처님 가르침의 품에서 쉬게 하려는 원願이 이런 모든 일들을 가능하게 한 것 같다.
인문학자에게는 ‘시간’은 그야말로 금과 같다. 전공분야의 책을 읽고, 생각하고, 연구를 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입했는가에 따라서 그 내공이 달라진다. 고등학교 동창이든, 대학 동창이든 내 주변의 거의 모든 친구들이 골프를 즐긴다. 그러나 나는 골프를 모른다. 화토치기나 바둑과 같은 놀음도 질색이다. 남자들 대부분이 좋아하는 스포츠 관람에도 전혀 흥미가 일지 않는다. 한 마디로 말하면 나는 남들처럼 놀 줄을 모른다. 노는 재주가 없기에, 불교를 공부하다가 시간여유가 생기면 소년시절에 발화하여 마음 한 구석에서 가물가물 타고 있는 ‘조각가 꿈’의 불씨를 키워서 진흙을 만졌다. 지난 2013년에 집중적으로 테라코타 작업을 하여 ‘성철 스님 두상’ 등 여러 작품을 만들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안식년에 들어가기 직전에 ‘발작성 심방세동’이라는 부정맥 심장질환이 발병했기 때문이었다. 그 동안 책상 앞에서 공부하다가 병을 얻었기에, 잠시 공부에서 손을 놓으면서 ‘흙장난’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니 제대로 놀 줄 모르는 불교학자가 잠시 쉬면서 나름대로 놀았던 흔적들이라고 여겨서 나무라지 말기 바란다. 또 시집이나 테라코타와 같은 나의 놀이의 흔적 모두 불교적인 내용을 소재로 삼고 있기에, 불교학자의 본분에서 크게 벗어나는 일도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내가 입으로 말하고, 글로 썼던 나의 불교가 나의 테라코타 작품에 얼마나 스며있는가? 이 책을 구입하신 독자 제현의 판단에 맡긴다. 즐감하시라. 나는 연탄재나 발로 차러 가겠다.
2019년 3월2일
도남 김성철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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